전화도 걸지 않고 문자 메시지를 남기지도 않고
그 시간 그 자리에,라는 약속만으로 수년을 이어 온 북아등을
오늘은 혼자일까 생각하며 9시를 넘기고 있는데 근엽이가 나타나고 순질이가 스쳐가고
불이토 친구들이 몰려왔다.
영곤이, 천수, 광순이, 창원이, 근엽이, 창길이, 경화, 정만이, 나 그리고 둘.
북아등은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불이토는 매월 첫째 또는 둘째 토요일 9시 30분,
불광동 토요일 이라는 공통 분모로 오늘처럼 함께 등산하는 횟수가 꽤 있었다.
물결처럼 흘러왔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북아등 친구들 속에서도
아직도 산행의 불씨는 꺼지지않고 이어가는 봄날이다.
북아등이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
지난 주 토요일엔 언묵이 혼자서 한바퀴 돌고 갔을 것이다.(554회차)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다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의 낭패감,
많은 무리들 속에 혼자 걷는 고독한 산행,
남이 나를 피하면 고독하지만 내가 남을 피하면 자유라는 의미를 새기며
고독도 자유도 아닌 고독한 자유로 산길로 나도 혼자서 걸을 때가 많았다.
이제 봄의 문을 활짝 연 봄꽃들이 지고 봄을 무르익게 하는 철쭉이 바위 틈에 피어나고
팥배나무 하얀 꽃이 머리 위에 풍성하게 맺히면 가진 것 별로 없는 나도 배가 부르다.
조팝나무 울타리와 수수꽃다리의 진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5월의 산행은 그래서 더 여유롭다.
봄의 창문인 그 꽃송이들을 통하여 수목의 세상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면
고독한 산행의 자유를 새삼 만끽할 수도 있단다.
수많은 등산화에 밟히고 밟혀도 견고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화강암 수리봉은
일주문처럼 오늘 산행의 첫 관문이 되고 우리는 둘레길 돌아 대호능선을 통하여 올라갔다.
5월의 뜨거운 햇살은 여름 못지않게 많은 땀을 요구하였다. 바람이, 그늘이 반가운 계절이다.
태양은 자외선 지수를 높혀 산행을 어렵게 하였지만 천천히 자주 쉬어 가면서
그의 공격을 여러 방법으로 버티고 견디며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지난번 서부모임에 따옥씨가 참여하며 빨간 처녀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였다.
아하, 그 꽃은 명자나무 꽃이예요. 장미과에 속하는…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집안에 심으면 처녀들이 바람난다고 했던 꽃이요
하얀 찔레꽃처럼 붉은 명자꽃에도 가시가 있지요.
그 꽃이 지금 남산 야외 식물원과 도서관 옆에 지천으로 피었어요.
그래서 봄날의 주말은 집에 있을 수가 없다. 온 몸이 근질근질해 진다. 산에라도 와야 한다.
불이토와 북아등의 경계를 허물며 인적 드문 길로, 그늘 짙은 곳을 골라 다녀도
많은 등산객은 피할 수는 없고, 강력한 햇살은 막을 수가 없다.
우리는 향로봉으로 올랐다가 다시 덕병이 길 방향으로 돌아와
탕춘대 능선과 계곡을 바라보며 그 아래 쉼터에 자리 잡았을 때는
우리들만의 영역과 시야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여유있게 챙겨온 음식을 나누면서 입하의 한나절을 즐긴다.
내려오는 길에
정만아 탕춘대가 무슨 뜻일까?
질탕하게 봄을 즐긴다는 의미가 있는 걸까?
정만이는 스마트폰 검색 들어갔다.
연산군이 미희들과 질탕하게 즐겼다는 곳이 탕춘대라고 요약해서 답한다.
그 탕춘대 소나무길에서 종수를 만났고 함께 그 길을 내려와 불광동 낙지집에 도착하였다.
종수가 뒷풀이를 맡았다. 영묵이도 찾아왔다.
북아등 555회차 불이토와 잘 다녀왔습니다.
-정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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