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산제를 마치고.
2015년 3월 22일,
시산제는 토속 신앙에 유교적 절차를 가미하여 지내는 의식으로
금년의 시산제 제상에는 열대과일인 바나나도 보였다.
아침 일찍부터 시산제 자리를 선점하여 지키느라 산행을 하지 못하였다.
시인이며 산악인인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산악인의 선서를 시작으로
덕산회 시산제는 37명이 참석하여 엄숙하게 시작되었다.
홍병구의 태평소 연주로 강신 절차를 밟았는데 금년에는 들을 수 없어서 아쉽기도 하였다..
점차 축제로 바뀌어가는 시산제를 마치고 준비해 온 떡과 술, 그리고 돼지머리를 썰어
한바탕 먹었지만 아쉬워서 뒷풀이로 불광역 인근의 맥주 집에서 한 잔 더 마셨다.
안주로 때 아닌 차기 회장 선임 건으로 동열이와 (김)성호가 총회 분위기를 연출하여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나는 산행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부암동의
백사실계곡과 인왕산 아래 수성계곡을 걸으며 달래었다.
불광역에서 구기터널을 거쳐 세검정까지 걸어서 백악산 아래 백사실계곡으로 찾아드니
왁자했던 귓속이 잔잔해졌고, 작년에 러브하우스에 동참하여 집수리 봉사를 했던 집을
바라보면서 백악산 자락으로 스며들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꿈과 이상을 무참하게 무산시킨 뒤 반정공신들이
검을 씻었다는 세검정을 일부러 피해서 올라갔다.
원래 연산군이 유흥을 즐기기 위해 지어놓은 누각를 영조 임금이 반정의 정당성을 기리기 위해
다시 짓고 세금정이라는 이름을 붙혔다고 한다.
연산군은 지금의 세금정초등학교 자리에 탕춘대를 짓고 봄을 탕진하며 질탕하게 놀았다고.
계곡 입구에 자리 잡은 현통사는 절의 규모는 작지만 본전은 대웅보전의 현판이 달려 있었다.
대웅전과 대웅보전의 차이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으면 대웅전이고
협시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이 있으면 대웅보전이라고 들었다.
이 일대는 예전에 한지를 만드는 조지서가 있었고 홍제천 바위 위에는 한지를
한번 쓰고 먹물을 씻어내고는 다시 말려서 재사용하려는 한지가 냇가의 바위에
널어 놓은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고도 들었다.
조금 내려가면 대원군의 별장인 석파랑이 보이는데 원래 안동 김씨 김홍근의 별장이었는데
몸집이 작은 대원군이 아들인 고종을 이곳에 와서 하룻밤 머물게 하고는
석파랑을 빼았었다는 이야기와 왕이 머물렀기에 자진하여 헌납했다는 설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한식집으로 운영하는데 음식을 먹어 볼 기회가 없었다.
백악산 자하문 고개에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올라 시비에 적힌 서시를 읽어보고
인왕산 아래의 수성계곡으로 내려갔다.
중종시대 폐비 윤씨가 인왕산에 치마바위에 올라 경복궁을 향해 치마를 흔들었다는
사연이 있는 인왕산은 북한산,남산과 더불어 나의 발길이 많이 닿은 산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를 보고 그 그림을 그린 방향을 찾아보다가
청와대 앞 광장까지 와서 인왕산을 바라 본 일이 생각난다.
효자동 방향으로 나아가면 흥인시장을 거치는데 요즘 이곳은 ‘서촌’이라는
이름 아래 북촌의 인기에 편승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들었다.
5호선 광화문역에서 동행했던 순걸이와 헤어지고
덕수궁과 숭례문을 바라보면서 남산 아래에 도착하였다.
덕수궁의 대한문이나 숭례문의 지붕은 왜 우진각지붕이어야 했을까?
맞배지붕은 아니라 하드라도 팔작지붕이나 솟을지붕으로 하면
좀 더 화려하고 권위가 보이지 않았을까? 궁금증 하나 물고 귀가하였다.
-정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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