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市 능선)

천리포 수목원의 새벽

능선 정동윤 2016. 4. 12. 19:36

새벽 4시 반,

눈을 뜬 후 부족한 잠을 청하며 뒤척였지만

눈은 더 말똥말똥해 졌고,

의식은 더 뚜렷해지면서 새벽 바다의 유혹이

아침 커피의 향처럼 살금살금 피어 올랐습니다.

 

잠 자는 동기들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부시럭거리며 옷을 챙겨 입고,

현관문을 밀고 나왔습니다.

언제나 현관문 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새벽 공기는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온기마저 묻어있어 편안해 졌으며,

어둠을 더듬던 내 발걸음은

어느새 얕은 콘크리트 방파제를 쉽게 넘어

파도소리에 이끌려 나갔습니다.

 

바다를 꽉 물고 놓지 않는 파도 곁으로

흡사 혼이 빠진 사람처럼 다가갔습니다.

발자국도 지워지고 신발도 빠지지 않는

젖은 해변의 모래를 밟으며 ,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파도소리만

귓속에 쌓고 또 쌓으며

일렁이는 달빛처럼 걸었습니다.

 

회색 구름의 갈라진 틈으로

새벽달의 희미한 달빛에 마음을 내걸고

향기로운 해변을 걸었습니다.

 

천리포해변의 물결은

초승의 봄바다에 하얗게 부서졌으며,

한 토막 짧은 해변을 걸었기에

내 발걸음은 멈출 수가 없었고,

내친 김에 처음 도착하여 서먹서먹했던

수목원 입구까지 내달았습니다.

 

어둠을 달래며 혼자 걷는 두려움보다

남부풍의 두꺼운 혁질의 수목들이

곤히 자고 있는 수목원에 찾아가

싱그러운 아침을 함께 맞이 할 기쁨이

훨씬 더 컸습니다.

 

새벽잠 이루지 못하고 찾아 온 손님에게

수목원은 좁은 문을 늘 열어 놓고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황홀한 수목원의 새벽으로

주사액처럼 서서히 빨려 들어가

검은 짐승의 실루엣처럼 수목들 사이로

잘 정비된 탐방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외곽 탐방로 위에서 내 발걸음은

아득하게 들리는 파도소리에 맞춰

가볍기만 하였습니다.

조심스럽게 돌고 나오니 여명이 찾아왔고

나무들이 모습을 보일 때 쯤

수목원을 빠져 나왔습니다.

 

혼자만의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내 부시럭거림에 잠이 깨어 뒤따라 나왔으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며

아쉬워 하시는 김형기 선생님께 미안하여

둘은 다시 수목원으로 향했습니다.

아침 7시에.

 

두 사람의 두런거리는 이야기 소리에

수목원 나무들도 모두 잠 깨어 일어났고

저마다 이름표 내밀며

자기들과 함께 하자며 붙잡았지만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시간을 핑게되며

묵묵히 제 할 일 잘 하고 있는 발걸음만 재촉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은 정말 시간이 없단다.

다시 찾아 올 그날에는

오랫동안 서로 눈맞추며

맘껏 어루만져 주마, 안녕"

 

겨우 빠져왔습니다.

'나의 이야기(市 능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령산 산벚나무  (0) 2016.04.12
꽃비 주의보  (0) 2016.04.12
기분 좋은날  (0) 2016.03.30
중랑천에서  (0) 2016.03.28
서울제비꽂  (0) 201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