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 달 이상 고향보다 살가운 북한산을
기억 저 멀리에 남겨두고 양재동 근처로
들랑거리다가 다시 그리운 산에 오르니
골짜기마다 눈에 익은 바위들,
능선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싱싱하게 팔랑이는 나뭇잎들의
그 반가운 손짓들이 고맙고 고맙다.
오월, 불광동 북한산 대호능선의 화강암길은
반사되는 햇살이 새하얗게 부서지고,
아침 나절임에도 뜨뜻해지는 더위가 온몸을 휘감는다.우리 5명은 더위를 밀고 들어갔다.
족두리봉 정상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바윗길 지나니 구슬땀이 뚝뚝 떨어진다.
좀 쉬고 싶은 충동을 큰소리로 외치고 싶을 즈음의 중턱 능선에서 선두가
슬쩍 왼쪽으로 꺾으니 떡갈나무 숲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우릴 반겨준다.
금방 만들어 낸, 때 묻지 않은 상큼한 산소가
는개처럼 펼쳐져 우릴 적신다.
난 잇몸으로 솜사탕 깨물 듯 입 벌려 들이키니 전신으로 생기가 퍼져나간다.
바로 이 맛이야.
내가 산에 오는 이유 중 하나가.
족두리봉은 떡갈나무 많은 숲을 통과하며 우회하고, 향로봉의 그 변함없이 고독한 바윗길을 오른쪽으로 우회한다.
길고 긴 바윗길과 깔딱고개를 힘겹게 돌아 오르면 비봉이 눈 앞이다.
더 이상 오르기를 중지하고 진관사 방향
으로 하산한다.
진관사 계곡 상부에 자리잡은
가칭 우리만의 '물푸레나무 산장.' 요즘
물푸레나무 그늘과 산벚나무 열매가
익어가고 산초나무 향이 그윽한 곳이다.
작은 바위웅덩이의 물은 탁족하기에는
그지없이 맑고 차갑다.
올 봄의 적당한 비가 산을 더 풍요롭게 하고
산을 찾는 마음을 비옥하게 만든다.
평평한 돌로 잘 깔아놓은 곳에 자리를
펴놓고 계곡의 바람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도시락을 풀어내면 만사가 잊혀진다.
이곳에서는 작은 일은 아주 잊게 하고,
큰 일은 더 작게 만들어 마음은 한결 편안해진다.
비울 수 있는 만큼 비우고 그 만큼의
여백을 지니고 산 아래로 내려온다.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을 감싸안으며
나즈막하게 그대 이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이외수의 '하늘빛 그리움'을 혼자 중얼거리며 초파일 행사로 분주한 진관사 지역을 거쳐나왔다.
다음날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관악산을 오른다.
사당역 6번 출구로 나와 인적이 드문
코스로 8명이 줄지어 산으로 들어간다
숙제처럼 찾아왔지만 산은 산이다.
비가 온다는 예보로 점심을 먹고 서둘러
하산하였다.
스승의 날이라 몇몇은 은사님을 찾아뵙기로 했다며 떠나고, 몇몇은 급한 약속이 있다며 떠나고 난 뒤 남은 셋은 오랜만에 고교야구를 보기로 합의하고 목동구장으로 3명이 출발하였다.
도중에 비로 인해 시합이 연기됐다는 소식을 확인하고 충무로 당구장으로 향했다.
충무로에 도착해서는 오랜만에 나타난 자를 위하여 늘 가는 그 골목의 술집에 자리 잡았다.
초로의 남도지방 부부가 운영하는 이곳의
안주인은 우선 음나무순 한 접시를 안주로 푸짐하게 내놓으시며 반가움을 표시하신다.
비 오는 일요일이라 손님이라고는
단골인 우리 밖에 없으니 심심한 주방지킴이 안주인께서는 부침개를 시작으로 주문없는 메뉴가 부지런히 나온다.
미안하여 몇 가지 주문을 하니 친구 한 명이
올 때까지 그냥 마시라며 주문 받기를
미루시고 우리는 부득부득 주문을 하고 만다.
이 맛으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곳 충무로에도 당구모임이 따로 있어 친구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당구를 치다 출출해지면
이 집에 와서 동태찌개며 김치찌개를 부탁하면 이 골목 최고의 밥상으로 내놓아 조강지처처럼 다른 데로 눈길 돌리지 못한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 충무로 골목은 한적하다
일요일이라 대부분의 점포들은 셔터를 내렸고 나를 포함한 4명의 산꾼들은 집으로 깃들지 못한 채 술잔을 거듭 채운다.
바깥주인은 비가 내린다고 문을 닫고,
우리는 비 내리는 골목 풍경이 정겹고
빗소리를 안주 삼아 자꾸 문을 열고...
비는 내리고 술병은 줄을 서고
내 입에서는 시가 몇 줄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고..
소주 6병 맥주 5병 푸짐한 안주로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6만원 내놓고
당구장으로 향한다.
나는 당구를 치지 않고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 기울이며
남산 한옥마을 지나 북측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귀가했다.
서울에 살면서 서울에 여행 온 기분을
느끼게 하는 비 내리는 숲 속을 거쳐
집에 가는 시간은 이 시처럼 짧았다.
고백/최문자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넘기는 도끼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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