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이기철

능선 정동윤 2023. 3. 28. 10:33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 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 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 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하는 하루도
도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 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 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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