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도종환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러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 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 문을
먼저 열어 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본다
돌아 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아내의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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