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십년 후의 나에게/나희덕
십년 후의 나에게,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그보다 조금 일찍 내게 닿았다
책갈피 같은 나날 속에서 떠올라
오늘이라는 해변에 다다른 유리병 편지
오래토록 잊고 있었지만
줄곧 이곳을 향해 온 편지
다행히도 유리병은 깨어지지 않았고
그 속엔 스물다섯의 내가 밀봉되어 있었다
스물다섯 살의 여자가
서른다섯 살의 여자에게 건네는 말
그때의 나는 첫아이를 가진 두려움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한 마리 짐승이 된 것 같아요, 라고
또 하나의 목숨을 제 몸에 기를 때만이
비로소 짐승이 될 수 있는 여자들의 행복과 불행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 자란 만큼 내 속의 여자들도 자라나
나는 오늘 또 한 통의 긴 편지를 쓴다
다시, 십 년후의 나에게
내 몸에 깃들여 사는 소녀와 처녀와 아줌마와 노파에게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그 늑대여인들에게
두려움이라는 말대신 사랑이리는 이름으로
책갈피 같은 나날 속으로
다시 심연 속으로 던져지는 유리병 편지
누구에게 가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줄곧 어딘가를 향해 있는 이 길고 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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