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능선 정동윤 2011. 10. 2. 09:07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15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뜻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이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나즈막하야 어뉘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애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리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을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니나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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