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 했수다.
산능선
비가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무언가 하긴 해야 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분통 터지는 일이다 막노동 밖에는 모르는 나 눈뜨고 인생 강탈당하는 기분이다. 아내야 그래도 잘 될 거라고 위로 하지만 해바라기처럼 나만 쳐다보면서도 늘 무언가 열심히 만들고 있다 누구 굶어죽는 꼴 보려고 작정을 했나 비는 왜 이리도 오는 걸까? 배부른 놈들 데모는 할 수 없겠네 더 많이 달라 아우성인 그들에게 가래침이나 퉤 뱉고 싶다 인생사 짐이 버거워, 비를 핑계 삼아 그냥 술 한잔 마셨다. 눈치 빠른 아이들 앞에서 어설픈 잘난 척은, 더 이상 할 수 없고 그저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비는 내려 또 공치게 하는가? 나라 경제가 왜 이 지경인가 우리는 일밖에 하지 않았는데도 살림이 이렇게 갈수록 쪼들리니 그냥 한 탕해서 숨겨 두고 감옥 갔다와서 정승처럼 지내야 큰 소리치는 사회인가. 성공과 실패의 명암이 확실히 구별되는 중년 나이에 공치는 날 마음 걸칠 곳 없어 하루가 더 고달프고 서럽다. 돈 쓸 일은 줄을 섰는데 쓸데없는 비가 이토록 내려 일마저 할 수 없도록 하나 이자는 일요일도, 비오는 날도 틀림없이 빠져나가는데 월세는 공휴일도 제삿날도 어김없이 받아 가는데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주무시지도 않고 반기신다. 오늘도 일이 너무 힘든가보다 애처로운 눈빛 듬뿍 담아서, 무뚝뚝하게 조석으로 마주하지만 늘 마음은 아리고 아프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큰 소리로 이야기하시는데 꼭 다투는 소리 같다는 아이들, 하셨던 이야기 또 들려주시면 처음인 냥 또 맞장구치지만 이야기하실 때는 얼굴에 웃음이 번지시기에 지난번에 들은 얘기라고는 차마 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이 다 비에 잠겨도 나는 잠길 수 없는 책임감,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 아내의 얼굴과 아이들의 웃는 모습에 거나하게 노래 한 곡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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