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삽의 흙/나희덕
밭에 가서 한 삽 깊이 떠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삽날에 발굴된 낯선 흙빛
오래 묻혀있던 돌멩이들이 깨어나고
놀라 흩어지는 벌레들과
사금파리와 마른 뿌리들로 이루어진
빛에 마악 깨어난 세계가
하늘을 향해 봉긋하게 엎드려 있다
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를
누가 저렇게 한 삽 깊이 떠놓고 가벼렸으면
그러면 처음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엎드려 있을 텐데
물기 머금은 말들을 마구 토해낼 텐데
가슴에 오글거리던 벌레들 다 놓아줄 텐데
마른 뿌리에 새 순을 돋게 할 수는 없어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말을 웅얼거릴 수 있을텐데
오늘의 경작은
깊이 떠 놓은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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