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한 삽의 흙/나희덕

능선 정동윤 2011. 8. 26. 08:33

한 삽의 흙/나희덕

 

 

밭에 가서 한 삽 깊이 떠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삽날에 발굴된 낯선 흙빛

오래 묻혀있던 돌멩이들이 깨어나고

놀라 흩어지는 벌레들과

사금파리와 마른 뿌리들로 이루어진

빛에 마악 깨어난 세계가

하늘을 향해 봉긋하게 엎드려 있다

 

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를

누가 저렇게 한 삽 깊이 떠놓고 가벼렸으면

 

그러면 처음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엎드려 있을 텐데

물기 머금은 말들을 마구 토해낼 텐데

 

가슴에 오글거리던 벌레들 다 놓아줄 텐데

마른 뿌리에 새 순을 돋게 할 수는 없어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말을 웅얼거릴 수 있을텐데

 

오늘의 경작은

깊이 떠 놓은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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