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치자꽃을 보며/박봉구

능선 정동윤 2011. 8. 30. 13:01

치자꽃을 보며/박봉구

 

 

키 작은 치자꽃 한 송이 기특하게 피어

백리까지도 갈 듯 곤혹한 향기를 보내

서울의 벽들 사이에 널린 사막을

가득 채우는 걸 보며

연탄장수의 검은 얼굴에도

난전에서 과일을 파는 이의 굽은 허리에도

약손처럼 앉는 걸 보며

내게는 문득 서울의 사막 훌훌 털고

남쪽 포구 한구석에 박혀

일자 소식없는 네 목소리가 곁엔 듯 들려왔다

어찌나 덩치가 큰 지

형제들이 만든 배는 장생포 앞바다를 다 가려 버리지만

망치를 든 이들에게 나누어지는 건

고양이 눈물만큼도 안된다고

바른말 하다가 일터를 잃은 이들에게는 밥이 되어주고

집 없는 이들에게는 찬 이슬 걷어 이불자락이 되어주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다 퍼주느라

삼십 줄이 이슥하도록 아직 홀로 지낸다는 네 체온이

천리를 넘어 털실같이 느껴졌다

치자꽃 향기에 실려 네 넉넉한 손이

우리들의 상처를 골고루 아물게 하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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