處暑記/신경림
여름 들어 나는 찾아갈 친구도 없게 되었다
사글세로 든 시장 뒤 반찬가게 문간방은
아침부터 찌는 것처럼 무덥고 종일
아내가 뜨개질을 하러 나가 비운 방을 지키며
나는 내가 미치지 않는 것이 희한했다
때로 다 큰 쥔집 딸을 잡고
객쩍은 농지거리로 핀퉁이를 맞다가
허기가 오면 미장원 앞에 참외를 놓고 파는
동향 사람을 찾아가 우두커니 앉았기도 했다
우리는 곧잘 고향의 벼농사 걱정을 하다가도
처서가 오기 전에 어디 공사장을 찾아
이 지겨운 서울을 뜨자고 별러댔다
허나 봉지쌀을 안고 들어오는 아내의
초췌하고 고달픈 얼굴은 내 기운을 꺾었다
고향 근처에 수리조합이 생긴다는 소문이었지만
아내의 등에 업혀 잠이 든 어린것은
백일이 지났는데도 좀처럼 웃지 않았다
처서는 또 그냥 지나가버려 동향 사람은
군고구마 장사를 벌일 채비로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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