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빚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1)
우리는 자신의 언어로 시를 정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정의를 토대로 해서 자신의 시를 빚어야겠지요. 그러나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요소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의 눈에 비치는 자연현상이나 예측할 수 없이 발생하는 모든 사건 즉 공간과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역사)을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가라는 큰 과제가 놓여있습니다. 당연히 모든 사물과 현상과 역사에 대한 해석의 기초는 자신이 정의한 그 정의의 잣대로 가늠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현명한 독자는 “경험적 시의 정의”와 “역사와 자연현상의 해석”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 둘은 사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은 역사와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눈(척도)이 되는 것이며 그 눈은 즉 “경험적 시의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약간 형이상학적으로 들릴지 몰라서 이해를 돕기 위한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동녘의 아침햇살이 은총처럼 온 누리를 덮을 때 새가 창가에 날아와서 지저귑니다. 이때 어떤 이는 “새가 운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새가 노래한다”라고 말합니다. 동일한 사물이나 현상을 두고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말 할 수 있음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시를 빚음에 있어서도 이것은 그대로 나타납니다. 또 한 예를 들어봅니다. 어느 백일장대회에서 제시하는 제목에 참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동일 제목으로 동일한 내용의 시는 지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두 개의 시가 나왔다면 그것은 복사본이 아니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하나의 장면을 설정하여 보기로 합니다. [어린 소녀와 할머니가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습니다] 독자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십니까? 어머니가 없는 철부지 손녀를 할머니가 데리고 가는 장면으로 보입니까? 마실 다녀오는 할머니를 손녀가 모시고 들어가는 장면으로 보입니까? 둘이서 시장에라도 가고 있는 중일까요? 직장에 나간 며느리 또는 어머니를 마중 나오는 중일까요? 아니면 아이의 아버지에게 가는 중일까요? 아니면 길을 잃은 아이를 파출소에라도 데려다 주는 것일까요? 이외에도 얼마든지 상황설정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만큼 다양한 삶의 정황이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소녀와 할머니가 길을 걸어가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가고 있다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아니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겠지요. 다만 보는 이가 짐작할 따름입니다. 역사와 현상이 바로 이와 같으므로 “경험적 정의”에 의한 관찰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석하게 되고 그 해석의 의미를 시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장소나 어떤 사건을 지나쳤다면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음 가는 곳에 눈도 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경험적 정의”를 가진 후에는 “관찰”이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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