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들

사유된 언어(詩語)의 관리

능선 정동윤 2011. 9. 20. 07:00

사유된 언어(詩語)의 관리


이제 “관찰”을 통하여 얻게 된 “자신의 언어”가 생겼습니다. 이 언어는 간단하게 한 단어일 수도 있고 길게는 한 문장 내지 여러 구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로소 시의 씨앗을 하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므로 문학의 공통분모에 해당한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씨앗은 금방 싹을 틔워 시라는 꽃을 피울 수 있지만 더러는 몇 일 또는 몇 개월이나 몇 년의 시간을 그냥 씨앗인 채로 묻혀있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면 그 씨앗마저 잃어버릴 경우도 허다합니다. 처음의 영감이나 감동이 사라져버리고 별 볼품 없는 일반적 언어에 불과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특히 메모를 해두지 않으면 몇 시간 또는 몇 일 사이에 바람처럼 날아가버리고 맙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 아무리 돌이켜 그 언어를 떠올리려고 해도 한 번 날아가버린 언어는 좀처럼 자신의 사유 속에 갇히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사유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값진 “시의 씨앗(모든 문학적 장르에 해당)”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요? 방금 말 했듯 메모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람의 두뇌는 기억에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필자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독자들은 많이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당시의 감동도 시들해지거나 아예 그마저도 없게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분위기나 흥분이 가라앉고 사념도 잠잠해지면 언제 본인이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할 정도로 전혀 다른 감정의 상태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감정이 흥분상태가 되어야만 시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감정의 흥분상태”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해보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보게 될 때에 촉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사유하는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메모를 통하여 시어를 관리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됩니다. 첫째는 그 씨앗을 잃지 아니하고 보관할 수 있다는 점이 큰 도움이고 둘째는 그 씨앗을 보면서 자꾸자꾸 개량된 씨앗을 얻을 수 있다는 큰 도움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덤으로 얻는 것으로는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그 씨앗을 얻을 당시의 장면이나 분위기를 재음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 편의 시가 어느 순간에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독자라면 이 메모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작업”이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필자는 “메모”를 일러서 “작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버릇이나 습관이 되지 않으면 힘들고 귀찮은 일이 되겠기에 “작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필자는 종종 메모를 하지 못하여 시어를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운전 중에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어떤 현상을 스치며 지나가다가 시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열 개 중에 아홉 개는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럴 때마다 어찌나 안타까운지 모른답니다. 차를 갓 길로 세우고 메모하는 경우도 있지만 교통여건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어디 운전 중에만 그러하겠습니까? 일상사에서도 비일비재하게 겪고 있는 일이므로 “메모”는 백번을 강조하여도 남음이 없는 말이랍니다.

시는 순간적으로 짧은 시간에 태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들은 오랫동안 숙성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 숙성의 첫 걸음은 “메모”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간단하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메모”이니 꼭 염두에 두고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힘들여 사유한 언어를 지키는 첩경이며 시어를 꽃으로까지 피워낼 수 있는 값진 파종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천재적 재능으로 시를 빚어내는 작가가 있겠으나 대개의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만들어진다”라는 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비범하지 않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말일 뿐 아니라 그만큼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다가옵니다. 거듭 강조하는 말은 꼭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