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에서/채필녀
속세를 한 짐 지고 절에 올랐다
절에서는 왜 다들 어리석은 중생이 되는지
매달아 놓은 스피커에서 불경소리 낭랑하게 퍼지는데
힌껏 폼을 잡고 사진 찍는 중년남녀
저것들 불륜이지
불경소리 들으면서 불경스러운 생각이나 하니
중생은 중생이구나
대웅전까지는 가파른 계단
짐풀기가 이렇게 힘들다
부처는 계단 오르는 심사만 봐도 훤히 알고
굽이 살피시나보다, 법당으로 들어가니
쥐 한마리 슬그머니 부처 허리를 돌아간다
부처에게는 쥐나 나나 미물 한가지로 보일까
께으름직하지만 오체투지로 엎드린다
눈물은 왜 그리 쏟아지는지 문고리에
옷자락만 결려도
머리 깎을 것 같다. 뜨락 옆으로
여름이나 되어야 꽃 필 패랭이가 잎 피우고 있으니
견뎌야 할 것이 많은 중생이 여기 또 있구나
풍경소리 문득 들리고 오줌이 마렵다
화살표를 따라 가다가
어쩐지 내 오줌은 오물구렁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계곡에 콸콸 쏟아내니 비로소 짐 벗은 듯 기볍다
바로 그 자리에서 손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시고 내려 오는데
앞서 가는 내 그림자에
누가 얹어 놓았는지 올라올 때 그 짐이
어깨동무 하듯 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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