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속리산에서/나희덕

능선 정동윤 2011. 9. 27. 12:43

속리산에서/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이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어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라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려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