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능선
돌림병은
산 속으로 도망가면 피할 수 있는 중세 흑사병과는 달랐다.
중년 남성들에게 집단적으로 감염 되었고 빈부따라 격차도 심했다.
고심 끝에 사람들은 은행으로 달려가서 금붙이를 모아 내었고
종이 영수증을 부적처럼 주머니에 꼭꼭 넣고 다녔다.
한동안 호전된 듯 착각 했던 병은
신용카드 속에 잠복해 있다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여름내내 빗줄기 타고 번졌고 찬 바람 불자 지하도로 스며들었다.
병세는 점점 깊어지고 죽음의 그림자가 등 뒤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기온은 계단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지 않는다.
어둠 타고 승강기로 쑥 내려갈 때 서울역 지하도는
하루를 마저 채우려는 환자들 잔치집 각설이처럼 불그레하다.
여름엔 가판대 펼친 자리에 신발 베고 신문지로 얼굴 가리면
해변의 파도 소리,산 속의 바람소리도 들려 왔었다.
낙엽이 지자 시큰거리는 한기와 지린내로 더욱 오그라든다.
찬 바람 부는 날 벽쪽엔 일찍부터 빈 자리가 없고
이 열, 삼 열도 지그재그 골판지 요이불로 어지럽다.
항상 구두를 가슴에 품고 자던 머리칼 허연 노인은
예전에 없던 젊은이가 늘어나자 새우처럼 생각에 잠겼다.
월남전 참전 용사는 머리통에 찌든 붕대 감고 돌아 왔고
벼룩 신문만 꼼꼼히 읽던 함구의 사내는 이제 신문을 버렸고
보잘 것 없는 옷 가방 끼고 다니는 신출내기는 그 가방 때문에
밤새 잠자리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가진 걸 다 잃은 뒤에야 편히 잠 들던 때가 몇 년 전이던가.
술로 정신을 놓아도, 혹 기분이 뻗쳐도 노래는 결코 나오지 않았고
명절에 찾아오는 떡과 과일에는 눈길조차 주기 싫었다.
모여라, 줄 서라, 차례를 지켜라. 얻어서 나눠주는 주제에
명령과 기다림은 질색이다. 그저 잠이나 깨우지 말았으면.
그 생색 혼자 사는 독거 노인들에게나 던져 주어라.
갈수록
돌림병은 확산되고 이곳마저 젊은이로 붐비니 이젠 어디로 가나
시립 병원 중환자실의 하얀 침대가 마지막 호사라든데....
갑갑했던 노숙자 쉼터의 직원은 언제쯤 올까
물 청소하는 새벽까지 잠 들지 못한다, 노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