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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중세 유교적 대의명분의 이상을 실현하다

능선 정동윤 2014. 2. 21. 09:01

[고전 소개]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11명이 참여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상황은 고려 건국 후 200여년이 흘렀고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가 서로 어우러져 고려 왕조가 안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정리가 필요하였다. 조정에서는 거란을 물리친 후 자신감에 차 있었고 여진의 위협에 대한 강렬한 국가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또 한편 문벌귀족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는데, 분열과 갈등을 국가가 망할 수 있는 원인으로 강조함으로써 현실비판의 뜻과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알리려 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이 책은 옥산서원 청분각에 보관되어 있는데 전 9책 50권이며, 종이의 질은 한지이다. 가로 22.4㎝, 세로 31.5㎝ 크기로 장마다 9행 18자로 짜여져 있다.
이 책은 자체와 판식이 완연히 다른 3종의 판이 혼합되어 있다. 고려시대부터삼국유사와 함께 경주부에 전해오던 것을 조선 태조 3년(1394)에 마멸된 것만을 골라 다시 새겼고, 중종 7년(1512)에 와서는 고판 가운데에서 전혀 볼 수 없는 것만을 보완해서 새겼다.
삼국사기는 사료가 가장 미약한 부분인 삼국시대를 다루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이다. 또한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통일신라시대를 포함한 한국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일연의삼국유사와 더불어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저자] 김부식 (1075~1151)

본관 경주. 자 입지(立之). 호 뇌천(雷川). 시호 문열(文烈).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경주의 주장(州長)인 위영(魏英)의 증손자.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근(覲)의 셋째 아들. 네 형제가 모두 과거로 진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부일(富佾) ·부식 ·부철(富轍)은 문한(文翰)으로 이름을 날렸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임명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인종 초에 이자겸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자겸이 제거된 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하였다. 1130년 정당문학 겸 수국사로 승진하였고 이어 검교사공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1132년에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당시에 묘청(妙淸) 등 서경세력이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三軍)을 지휘하였으며, 출정하기 전에 먼저 개경에 있던 정지상(鄭知常) ·김안(金安) ·백수한(白壽翰) 등을 죽였다.
장기전을 벌이면서 1년 2개월 만에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그 결과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 ·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事上柱國兼太子太保)에 승진하였다. 1138년에 검교태사 ·집현전대학사 ·태자태사(檢校太師集賢殿太學士太子太師)를 더하였다. 이어 함께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燎)와 개인적인 불화가 생겨 그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아냈다가 뒤에 사면되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1142년에 사직하였다.
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면서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號)를 더하여 내렸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史論)을 직접 썼으며, 1145년에 완성하였다. 한림원에 있을 때에는 사륙변려문체(四六폿儷文體)에서 당 ·송 시대의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려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은 그를 고금에 밝고 글을 잘 짓는 박학강식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의종이 즉위한 뒤 낙랑군 개국후에 봉하고 《인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죽은 후 1153년 중서령이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 20여 권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중세 유교적 대의명분의 이상을 실현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1145년 고려인종23년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정사로 그 구성은 중국 사마천의사기를 인용하여 만든 기전체 역사서로 본기28권은 신라,백제,고구려의 왕조사를, 지9권은 제도에대한 설명,연표3권은 각 시대별 역사,열전10권은 중요인물들의 전기로 구성되었다.이는 한국역사서의 기원을 만들었다.만약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한국역사는  후대에 추정에의한 역사만 있을 뿐이다.물론 사기를 만든배경이 김부식이 송나라 사신으로 갔을때 중국에서 자치통감 받아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 지나친 중국의존 사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어쩌든 김부식의 사기는 우리나라역사서
의 단초를 제공한 중요한 역사서로 중요한 자료이다.역사는 정치적인 영향을 받지말고 객관적으로 중심을 잡고 잘기록해야한다,그 기록이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해야한다. 삼국유사처럼 신화처럼 기록하는것보다는 사실에 입각한 fat위주로
기록해야한다.삼국사기는 삼국유사와 더불어 한국역사의 쌍벽을 이루는  정말주요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 중세 유교적 대의명분의 이상을 실현하다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고려 중기 학자로 왕의 지시에 따라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당시 유행한 유교사상과 사대주의 이데올로기가 고스란히 반영된 역사서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대사를 편찬하기 위한 사료가 부족한 상황이었고, 고려의 지식인 계층인 사대부들의 역사 교육을 목적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당시의 중요한 왕도정치와 충,효,인의예지를 강조한 유교사상을 담아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부족한 고대사 자료를 메우기 위해 중국의 역사서 중에서 우리 삼국의 고대사를 언급한 부분을 참고하였고, 그 과정에서 당시 송나라의 자치통감 등 중국의 정사에 기록된 부분을 활용하여 삼국사기를 저술하다 보니, 다분히 당시 문화대국인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녹아들어갈 수 밖에 없겠다는 개인적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중국은 고대 수천년의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역사서를 가진 나라이고,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각종 저술과 기록을 남겨 후대에 이러한 역사를 통해 교훈과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문화대국임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중국의 변방에는 소위 오랑캐라 불리는 비문명 민족도 있었고, 침략과 전쟁으로 역사적 기록의 소실도 많았겠지만, 아직까지 본존,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과거 역사기록에 비하면 우리 나라는 이러한 과거 역사 사료의 질적, 양적인 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나, 흔히 삼국사기와 함께 대비되는 삼국유사의 경우도 조선 사대부들도 외면하였고, 나중에 일본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연구하기까지 한 것도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거 역사에 대한 다양한 저술과 기록이 많지 않음과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장려되는 환경이 더욱 조성되어야 하지 않냐는 개인적 소견이다. 삼국사기는 그런 점에서 유교사상 중시, 중국 사대중의 같은 맹점도 있지만, 그 자체로 우리 고대사의 정사기록으로 가치를 충분이 인정 받을 수 있고, 이러한 삼국사기 기록외에도 전해져 오는 우리 고대사 기록의 발굴과 연구가 더욱 활성화 되어, 우리 고유 역사관과 정체성 확립에 보탬이 되길 기원한다.

 

[삼국사기] 중세 유교적 대의명분의 이상을 실현하다

[문] 김부식의 이데올로기가 삼국사기 기술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이를 본인의 이데올로기(역사관)를 바탕으로 재해석 해 보시오.

[답] 김부식은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로서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중국의 사서편찬 관행과 춘추필법을 삼국사기 편찬에 적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 당시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위한 국내사료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고구려왕조와  백제왕조 자체가 편찬한 사서들이  망실되고, 고려 현종때에 거란의 침략으로 수도개경이 함락되어 궁전이 소실되는 참화를 입는 바람에 신라왕조자체가 편찬한 사서는 물론 고려왕조 자체의 실록도 대부분 망실되어 고려사 가운데서도  현종이전의 7대 사적이 소략하게 전할 뿐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편찬당시의 김부식의 연령은 70대의 고령으로서 국내에  전하여진 각종 서적자료와 비문자료를 적극적으로 수집하지 않았으며 그런 노력을 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단지 고려초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소략한 구삼국사를 중심으로 부족한 국내사료를 보충하기 위하여 편찬 당시 송나라에서 편찬되었던 자치통감과 당서를 비롯한 중국의 정사에 기록된 국내기사를 보충하여 삼국사기를 서술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외형상으로는 체계잡힌 역사책을 내놓았지만 그 내용은 1000년 가까운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책의 내용으로는 너무 나 소략한 것이며, 더욱이 그의  유교적 합리사관에 의거  괴이하다고 생각되는 부분 이나 유교윤리에 상치되는 내용의 전승을 과감히 삭제 또는 변개하였기 때문에 삼국당시의 사실이  더욱 왜곡되어 전해졌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모화사상에 입각하여 전승되어있는 사실을  없애고 없던 사실을 새로 만들어서 거짓 역사를 만들었다고 비난 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당시 고려조정을 좌지우지 하였던  재상으로서 강대국인 송나라가 북방 기마민족세력인 거란과 여진에게 정복당하여 화북지역을 잃은 상황하에서, 군사강국인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자는 묘청을 비롯한 소위 자주파들의 망동을 좌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그들의 주장을 선대사서에 반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비록 왕도정치가의 합리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한 역사 서술의 기본원칙을 고수하며 획일적이고 융통성없이 삼국사기를 써 내려갔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것이며, 오히려 당시까지 전승된 사료를 체계있게 정리하여 우리에게 전해준 공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비록 중국 사가들에 의하여 영향 받은 바가 크다 하더라도 삼국사기라도 없었으면  우리는 1000년간의 역사가 공백으로 남은 민족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바라는 대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보다 상세한 자료에 입각하여 그 시대의 역사를 기술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더라도, 삼국사기의 곳곳에서  당시 국내 최고의 지성과 식견을 가지고 자기나라의 선대역사를 서술하며 그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에 귀기우려 듣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삼국사기] 중세 유교적 대의명분의 이상을 실현하다
김부식은 고려시대 유교사상의 신봉자로서 자신의 사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철저한 유교주의, 사대주의에 입각하여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한국사의 중요한 자료로서의 위상과 동시에 명확한 한계를 드러낸 역사서로 평가되고 있다.

충효를 중시하는 유교사상은 김유신, 계백, 을파소 등의 충정을 다루고 있으며 중국을 숭상하는 사상은 당나라에 이민한 흑치상지를 성공한 이민자로 그리고 있다. 또한 선덕여왕에 대해서는 지혜로운 여왕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늙은 할미가 나라를 다스렸으니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비난 하는 등 삼국의 역사를 온전히 자신의 사상에 입각하여 기술하였다.
이는 고려시대에 유교사상이 얼마나 지배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수 있겠다.
다만 당시 역사를 서술할 수 있는 계층이 유학자 층이었던 까닭에  또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서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란 사실만을 그대로 적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수많은 개개의 사실들이 서로 연결되고 유기적으로 조화됨으로써 역사가가 바라보는 시대상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김부식 또는 고려시대 유학자들이 바라보는 삼국의 시대상이 어떠했는가를 알수 있는 사료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고 그로 인해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게 우리의 역사가 해석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더욱 크고 다양한 의미를 찾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비추어 볼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중세 유교적 대의명분의 이상을 실현하다

사대주의 관점에서 장수왕의 평화추구 외교정책을 조공을 열심히 했다고 기술했고 유교의 남성중심주의 관점에서 선덕여왕이 왕이 되고서도 신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기술했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하고 다양한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 중세 유교적 대의명분의 이상을 실현하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관찬 사서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그 동안 삼국사기에 대해서는 유교적 관점에서 쓴 사대주의적 역사서라거나 신라 중심으로 기술했다거나 하는 등의 비판이 있었다. 반면 삼국사기가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입각해 쓰인 최초의 사서로서 오히려 뒤에 나온 삼국유사보다도 더 발전된 역사 의식과 역사 서술의 산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관점들을 토대로 삼국사기의 편찬과 그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삼국사기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동기는 김부식이 왕에게 올린 글에서 잘 드러난다. 즉 인종은 첫째, 당시의 지식인들이 중국의 책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우리 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는 점, 둘째, 중국의 사서에 삼국에 관한 것이 실려 있지만 외국사이기 때문에 소략하다는 점, 셋째, 우리 나라에서 편찬한 고기는 글이 거칠고 내용이 빠진 게 많다는 점을 들며, 새로이 훌륭한 역사책을 편찬해 후세에 교훈으로 삼고자 삼국사기의 편찬을 명한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중세 유교적 대의명분의 이상을 실현하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하던 고려중기 사회는 신분보다는 능력이 우선하는 신분제가 도입되고 과거제도가 시행됐고 또한 한문이 공용어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다.삼국사기는 중국의 사기를 본 떠 기전체로 기술하였는데 고려중기 유교이데올러기에 입각한 가치관으로 역사를 집필하는 한계를 보였다는 한계점을 보여주었다.유교이데올러기의 충신으로 고구려의 을파소,신라의 이사부, 백제의 계백을 기술하였고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김부식의 지나친 사대주의가 비판의 대상이된다. 긍정적인 측면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국가번영에 기여하였으나 단점으로는 큰나라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삼국사기의 대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김부식의 유교적 사대주의 이데올러기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다시 해석하여 장기적으로 국가의 이익이 무엇인지 판단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장수왕의 외교적 활동에 대한 재평가와 역사의 새장을 연 선덕여왕의 재평가, 당으로 귀화하여 출세한 흑치상지의 재평가는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데 많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한반도를 둘러싼 현재의 상황도 김부식이 살던 시대와 많은 유사점이 있는 바, 자주적 외교와 번영을 위해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다시 인식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끝

 

[삼국사기] 중세 유교적 대의명분의 이상을 실현하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동기는 사대부들이 잘 알지 못하는 우리 역사를 인식하여 중국 사서의 우리나라 기록를 참고하였고, 그리고 고대기록은 내용이 졸렬하므로 왕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역사를 후세에 남긴다고 기록하고 있다.삼국사기는 사대주의의 산물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당시 삼국사기의 편찬된 시기를 고려해 볼 때 맞지 않다고 하고 있다.
내용은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를 견지한 것이지만 반면에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구성은 기, 전, 지, 표 등으로 서술하는 역사 서술 체재로서 가장 중요한 기전의 이름을 따서 기전체라고 하는데, 이는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최고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들도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물론 아직 약한 경제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으나, 우리들부터 정치인들 정치 못한다고 나쁘게만 생각치 말고, 깊은 역사의식을 한사람씩 갖추어 나가면 지금의 일본과 독도를 둘러싼 외교문제나 중국과의 동북공정 문제 등은 너무나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 중세 유교적 대의명분의 이상을 실현하다
김만중은 반동적, 혁신적 면을 갖춘 인물이다. 구운몽의 표면적 주제는 인생무상과 유교이념을 제시하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불교적인 송사상과 제행무상관에서 찾을 수 있는 인생무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유불도의 사상이 합쳐긴 것이다로 할 수 있다.
김만중이 유교집안에서 자라나서 유교사상에 젖어있고, 그의 학문이 박학다식하여 도교와 불교에도 정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상이 유불선 사상의 화합 상태에 있었다.
누구나 화려한 삶을 꿈꾼다.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것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만족하고 꿈꾸던 것을 이루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하지만 금방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버립니다. 아무리 신나고 재밌더라도 그것이 끝나고 나면 그만큼 실망이 더 커져 버린다. 더 커다란 불을 만들려고 하면 더 많은 장작을 써야 하고 그만큼 더 많은 재를 남겨야만 한다. 그러므로 화려한 삶을 꿈꾸는 대신에 남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는 그런 삶을 꿈꾸는 것은 어떨까? 멋있게 타오르는 불보다는 물론 타고나면 없어지기는 마찬가지이나 우리가 꼭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양초가 더 낫지 않을까?

삼국사기] 중세 유교적 대의명분의 이상을 실현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설화와 신화를 그대로 기록하던 고대의 역사학으로부터 벗어나 철저한 문헌기록에 의존하여 쓰여졌다.

또한 기록된 사료의 사실 여부를 검토 및 비판하고 자신의 견지에서 역사사건을 비판했으며 우리 나라만의 관점에서만 역사를 논하지 않고 당시 세계적인 보편성을 띤 유교라는 관점에서 한국 중세사학의 기초를 정립하였다.

당시의 시대분위기나 정치상황에서 볼 때, 그리고 역사서술 체제로 볼 때 불가피 하였다고는 하지만 김부식은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갖혀 중국중심의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또한 유교적 남성본위 사상이 반영되어 신라 여왕에대한 불편한 시각을 기술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신라 중심적으로 씌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 또한 삼국사기의 한계로 봐야할것이다.

또한 김부식은 철저한 유교적 합리주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우리의 고대사를 정리했기 때문에 나타난 한계도 있다. 신화를 비판하고 증거주의를 내건 나머지 단군조선과 삼한의 역사를 누락하였으며, 전통문화를 축소시켰다. 당시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이 사회변동 속에서 유교이념으로 지배질서를 재정립하고 대외적으로 온건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결과 그러한 한계를 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