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읽기

[삼국유사]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문화가 투영된 역사서

능선 정동윤 2014. 2. 21. 09:04

 

[고전 소개]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로,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하엿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있다. 흥법편은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내용, 탑상편은 탑과 불상에 관한 내용, 의해편은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한 내용, 신주편은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내용, 감통편은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내용, 피은편은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효선편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등을 각각 수록하였다.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그 특징을 보면 첫째, 역사·불교·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등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기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둘째, 차자표기(借字表記)로 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誓記體)의 기록, 이두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고대어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되며 14수의 향가는 우리나라 고대 문학 연구의 값진 자료이다. 셋째, 한국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탑상편의 기사는 탑·불상·사원건축 등에 그리고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유적, 특히 불교의 유물·유적을 조사·연구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문헌으로 꼽힌다. 넷째,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하던 화랑과 낭도들에 관한 자료를 상당히 전해주고 있다. 종교적이고 풍류적인 성격을 많이 내포하고 있으며,『삼국사기』 화랑관계 기사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7년(1512) 경주(慶州)간행(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삼국유사 중 결장(落張)이 없는 유일(唯一)한 책인 동시에, 같은 판본(板本) 중에서도 인출시기(印出時期)가 가장 빠른 본(本)으로 평가된다.

[저자] 일연 (1206~1289)

속성 김(金). 이름 견명(見明). 자 회연(晦然)·일연(一然). 호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 보각(普覺). 탑호 정조(靜照). 경상북도 경산(慶山) 출생. 1214년(고종 1) 9세에 전라도 해양(海陽:현 광주)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대웅(大雄) 밑에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승려가 되었다.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 12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 1246년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261년(원종 2) 왕명으로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어 목우(牧牛)의 법을 이었다.
1268년 운해사(雲海寺)에서 대덕(大德) 100여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조직, 그 맹주가 되었다. 1277년(충렬왕 3)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되어 왕에게 법을 강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1284년 경상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탑과 비는 인각사에,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 및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어록(語錄)》 《계승잡저(界乘雜著)》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조도(祖圖)》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僧法數)》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점송사원(禪門拈頌事苑)》 등이 있다.

 

[삼국유사]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문화가 투영된 역사서
삼국유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이번 강의를 통해 조금이나마 삼국유사와 그에 따른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 점에 대해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삼국유사는 신화와 설화와 같은 기이한 이야기를 다룸과 동시에 김춘추를 비롯한 왕족들의 이야기도 다양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전부터 삼국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의 최고로 오래된 역사책으로 평가되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진실을 평가함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고조선에 대한(단군 시조, 호랑이와 곰 부족 등) 설화는 반만년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증명해주는 사실적인 자료 제공의 역할 뿐만아니라, 조상들이 나라에 위기가 닥치고 힘든 시기가 있었을때 나라를 지키고 더 강하게 단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역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나라가 처해진 현실도 그냥 안주할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지구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국가, 일본의 끊임없는 독도 분쟁 등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의 역사관과 단합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봤을때, 물론 짧은 시간 삼국유사에 대해 공부하고 알게 되었지만 삼국유사라는 고서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우리의

 

[삼국유사]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문화가 투영된 역사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의미는  첫째, 일본의 초기 이주집단은 한반도로부터 이전해온 사람들이었다는 증거이며. 두째, 나라는 왕이 있다고 만들어 지는것이 아니고 백성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 만들어지는것으로서 전형적인 민본사상을 나타내는 백성과 임금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으며, 세째로는 바닷일을 나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수중고혼을 달래주는 동해 무혼굿의 전신이다. 이와같이 삼국유사의 연오렁과 세오녀설화의 의미는 오늘날에있어 일본 이주 집단의 근원이 한반도 임을 알수 있듯이 독도는 명백이 한국땅이라는 역사적 증거이며,. 나라의 근본은 국민임을 일꺠워주고있으며, 무혼굿의 근원을 알수있는 역사서이다.또한 도화녀 비형랑 설화의 의미는 절대적인 존재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인간의 습속을 보여주고 있으며, 평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을 이해할수 있는 이기이며,특히 진지왕의 축출이 억울항 것임을 보여주는 설화로써 평법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왕 축출의 억울함을 알리기위한 역사서 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문화가 투영된 역사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승리한 역사의 왕조들이 만든 역사서라는
것은 모든사람이 알고 있지만,
일연의 삼국유사는 개인적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어, 그 시대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황룡사 이야기는 내가 알지 못한 것도 많이 있어 도움이
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九黃洞)에 있었던 절. 황룡사(黃龍寺)라고도 함.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 대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불사로 고쳐 황룡사라 함. ≪삼국유사≫에 따르면 동왕 30년(569)에 완공됨. 과거불인 가섭불시대의 칠처가람 가운데 하나로,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었으며, 신라 제일의 절이었음. 한편 서천축의 아소카왕이 철 5만 7천근과 황금 3천분으로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다가 실패하여 이것과 1불 2보살의 모형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인연있는 국토에 가서 이루어지길 발원하였는데, 진흥왕 35년(서기 574년)에 이것으로 장륙상과 두 보살상을 주조하여 봉안하였다고 함. 진평왕 6년(서기 584년)에는 금당을 완공하였고, 그 뒤 당 나라에 갔던 자장이 태화지에서 신인을 만나 이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구한의 조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귀국하여 선덕왕 12년(서기 643년)에 구층탑을 세울 것을 청하여 백제의 명장 아비지의 도움으로 2년 뒤에 완공을 보았음. 그 뒤 역대 임금들이 국가에 큰 일에 있을 때마다 이 절의 강당에 행차하여 백고좌강회를 열었음. 효소왕 7년(서기 698년)에 구층탑이 소실되었다가 성덕왕 19년(서기 720년)에 다시 세웠으며, 경덕왕 13년(서기 754년)에는 황룡사 대종을 주조하였음. 구층탑은 경문왕 8년(서기 868년)에 중수하였으나 그 뒤 여러 번 벼락에 맞아 중건하였으며, 고려 고종 25년(서기 1238년) 몽고군의 병화로 절과 구층탑?장륙상 모두 소실되었음. 절 터에는 중문?목탑?금당 등의 초석 등이 현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