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읽기

[삼민주의] 중국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

능선 정동윤 2014. 2. 21. 10:37

[고전 소개]

쑨원(손문)이 망국의 길로 접어든 중국을 구하기 위해 제시한 혁명이론이자 그의 정치 사상을 대변하는 삼민주의를 멸만흥한의 내용인 민족주의, 정치 혁명의 근본인 민권주의, 평균지권의 민생주의로 나눠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삼민주의는 물론 당시 중국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탄생된 이론이지만 현재의 우리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토착화시키는 데 있어서 충분히 한번쯤 사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사상이다.

[저자] 쑨원 (1866~1925)

자는 일선(逸仙)이고, 호는 중산(中山)이다.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국부(國父)''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광둥성[廣東省] 샹산[香山:현재의 中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가 14세 때 하와이에서 일하고 있는 형 쑨메이[孫眉]에게로 가서 호놀룰루의 신교계(新敎系)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전통과 신문화의 갈등으로 고향에서 쫓겨났다. 홍콩으로 이주하여 세례를 받고 광저우[廣州]와 홍콩[香港]의 서의서원(西醫書院: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광저우 등에서 개업하였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三合會)의 수령인 정스량[鄭士良]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의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反淸運動)에 가담했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領地)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발 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大總統)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청나라가 아직도 건재했기 때문에 이를 타도하기 위해 베이징을 정복할 북벌군을 조직해야만 했다.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넘겨 주었다. 당시 타협은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공화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하였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어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를 개조하여 국민당을 설립하였고 위안스카이에 대항하였지만 무력에 밀려 폐퇴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쑹자오런[宋敎仁]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이 실패하자,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護法運動)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反帝) ·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19년 5.4운동이 일어나자 중화혁명당의 대중성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중국국민당으로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장병을 양성하고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1925년 3월 12일 베이징[北京]에서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난징[南京] 교외의 중산릉[中山陵]에 묻혔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그것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프랑스의 혁명사상(인민주권설)과 영국의 사회학설(H.조지의 單稅論 등)을 받아들여 중국 현실에 적응시킨 것이었다. 만년에는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삼민주의] 중국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
-. 삼민주의: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
-. 신해혁명이 한국에 끼친 영향
   많은 한인지사들이 중국으로 대거 망명을 하게 됨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 정치체제를 공화제로 선택
   공화제 채택
   한국인들에게 하나의 비전 돌파구로 여겨졌음
   해방이후에도 중요한 정강정책으로 역할
   임시정부 수립전후 한인 지사들과 중국 혁명가들 사이에 연대 단체가 나타남
-. 쑨원의 중화주의와 한국인의 사대주의가 문제가 됨
   쑨원의 중화주의:중국과 일본 중시의 대아시아 주의
   한국독립운동가들의 사대주의:지나친 중국에 의존11
-.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각자 계승한 삼민주의에는 모두 특색이 있는데 변화되는 삼민주의에는 당시의 시대상과 각 파벌 노선이 반영되었으며 1905년 초기의 삼민주의는 만주족 축출 중화회복 공화국 창립 소유의 균등을 주장하였으며 마오쩌둥에 의해 신삼민주의로 발전되었고 후진타오 정부가 중국 헌법에 인권에 관한 사항을 펌가하였을때 다시 제창하였다
-. 삼민주의는 우리나라 근.현대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
  
[삼민주의] 중국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
1911년 신해혁명,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우는데 쑨원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때 우리나라는 1910년 신해혁명 전 해에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 많은 한인 지사들이 신해혁명의 소식을 듣고 희망을 가지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체제를 공화제로 만드는데 영향을 주게 되며 중국의 혁명가들 사이에 연대 단체들이 만들어져 서로 돕는 관계가 형성된다.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인들의 연대가 형성되었으나 중국과 일본 중심, 중화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대아시아주의를 주장하였다. 한국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점도 많으나 중화주의의 한계를 보이며 당시의 한국독립운동가들도 지나치게 중국에 의존하는 면도 있었다.
임시정부의 정강정책이며 해방이후에도 중요한 정책의 역할을 한 임시정부 요인 조소앙의 삼균주의(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는 삼민주의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에 미친 삼민주의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서구의 민주주의를 중국이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쑨원은 중국의 실정과 전통에 맞게 수용해야한다는 주장이다. 국민과 정부의 관계를 정권과 치권의 구분한다. 정권은 국민의 정치적 권한(민권)을 가진 국민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고, 치권은 위임받은 정부의 통치권, 정부의 권리를 전문가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위임받은 전문가는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권한을 국민들로부터 부여받아야 한다.
국민들이 정권을 어떻게 행사하는가는 직접 민주주의의 내용까지 포함한 선거, 파면, 창제, 복결권을 민권 또는 정권이라 지칭한다.  
치권은 그것을 위임받은 정부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효과적으로 새행하느냐의 문제로서 서유럽 민주주의의 삼권분립(입법, 사법, 행정)에 고시권, 감찰권 2가지를 덧붙여 오권(입법, 사법, 행정, 고시, 감찰)을 주장한다.
고시권은 어떻게 하면 부정부패없는 능력있는 관료를 뽑을 것인가의 문제로 중국 과거제도의 오랜 역사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며, 관리들의 부패를 막는 감독의 측면에서 감찰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쑨원의 오권분립은 오늘날 대만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고시원과 감찰원의 원장은 가장 도덕적인 수준이 높은 대학자가 주로 맡고 있다. 쑨원은 서구의 민주주의를 다각도로 관찰하여 이를 중국의 역사와 전통에 맞게 중국식 공화주의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