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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치매

꽃 치매/정동윤 지금 남산은 벚꽃의 절정 인파의 홍수 하얀 터널 아래선 잠시 선글라스를 벗습니다 저 빛나는 봄꽃을 어찌 유리알을 통해 보겠어요 몇 해 전 장모님 돌아가시기 전 치매로 소녀가 되었을 때 만날 때마다 벚꽃 이야기 하고 또 하셨지만 늘 처음인 양 귀 기울였지요 유모차 탄 아이부터 지팡이 짚는 할아버지까지 산책길에 넘치는 사람들 모두 낯선 사람뿐이지만 멀쩡한 사람도 꽃그늘 아래서 그저 웃으며 사진 찍네요 벚꽃 피울 때마다 휴대폰에 담으며 지난해의 그 흥분과 감동 까맣게 잊어버리고 새 벚꽃에 또 열광하는 걸 꽃 치매라 불러야겠어요

일상이 여행

일상이 여행/정동윤 일을 놓았으니 한가하고 한가하니 여유롭다 약속은 하루에 하나 시간이 걸리적거리지 않아 좋다 오전 한나절은 맘에 드는 책을 보거나 쓰고픈 글을 적으며 부부는 각자의 일에 빠졌다가 점심 후에는 약속이 있으면 약속 장소로 없으면 시장이나 마트나 병원 등 일상의 일을 함께 꾸려나간다 마음 내키면 근처 산이나 동네 공원을 가끔은 한강으로 서해 섬으로 가 엉킨 마음을 풀고 온다 올해는 더 나아가 중미 아열대의 나라 파나마의 야자수 그늘 아래서 네댓 달 머물다가 오기로 했다 여행은 늦었다 해도 늦지 않았고, 좀 이른 듯해도 이르지도 않기에 마음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지금이 바로 여행할 때'라 여긴다. 4월 중순에 떠나기에 요즘은 여행 준비로 들뜬 시기 설레며 구름을 밟고 다니는 나만의 오롯한 시간.

세종대로의 강

세종대로의 강/정동윤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 흐르는 강을 세종대로의 강이라 불러본다 어떤 흐름에서는 강물이 붉게 물들고 어느 지점에서는 노란 물결이 반짝이고 또 한 교차지에서는 파란 물이 흐르기도 한다 저주의 악담이 들려오는 여울목에선 내 친구의 모습이 물빛에 출렁이기도 하고 또 다른 분노가 휘청이는 물결 소리엔 다른 이웃의 얼굴이 물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주말마다 격랑으로 흐르면서 물결과 물결이 부딪히고 친구와 이웃이 눈 흘기는 넓은 세종대로의 강물 언제쯤 깊고 잠잠히 흐르는 고요한 강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