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저녁 눈 내린 저녁/정동윤 저녁을 켜면 어둠 어둠은 켜놓을수록 깊어지는데 내 깊어진 몸짓 눈만 깜박해도 방전되는 세월 앞에 십 리를 걸어도 백 리를 달려온 듯 숲가뿐 일상 눈 내린 저녁 불타는 하얀 숲이 꿈으로 번지는 여운 잠들면 아침까지 깨지 않는 하얀 날이 좋아라 나의 이야기(市 능선) 2023.01.14
서울제비꽃 서울제비꽃/정동윤 내 은퇴의 들판에 꽃샘추위가 오랑캐 쳐내려오듯 느닷없이 달려든다. 말죽거리공원 양지바른 곳에 핀 제비꽃 한 송이, 구도자처럼 엎드려 보니 등산화에 묻은 적막과 우울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작게 살아도 당당한 제비꽃 한 송이 슬며시 내 휴대폰에 자리잡는다. 손바닥 안에서 해바라기보다 커진 키 낮은 생명이 의미 이상의 의미로 제 갈 길 씩씩하게 가는 모습, 내 휴대폰은 덩달아 재충전 된다. 나의 이야기(市 능선) 2023.01.11
아직 멀었다네 아직 멀었다네/정동윤 감동적인 풍경만 보면 극적인 사건이 생기기만 하면 감탄이 터져 나올 글이나 가슴 저미는 시를 원하는 친구가 있어요 좀 더 짠하게 펑펑 우는 건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 한 방울 뚝 떨어지게 해 달라는 거지요 그런 글이 술술 나와야 진짜 시인이랍니다 이런 어려운 요구에 이제는 눈물이, 가슴 저미게 하는 감성이 모래처럼 말라버렸다고 고백하고 시인의 감정도 때에 이르면 건조해진다는 말로 설득합니다 벽돌처럼 나이를 쌓다 보니 출렁거리던 감성은 사물을 찬찬히 바라보고 건널목 같은 거리를 두고서야 비로소 차분해질 수 있었죠 새삼 마른 감성을 건드려 눈물샘 자극하는 억지 솜씨로 감성팔이 하는 것이 오히려 경망스럽고 싼 티 나고 구차해 보였거든요. 그래서 일상을 시처럼 보고 느끼는 대로.. 나의 이야기(市 능선) 2023.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