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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백석이 되어

내가 백석이 되어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 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 오는 날 재로 뿌려 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 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 놓고 간 그녀의 스무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

사평역에서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시간은 매듭이 없다

시간은 매듭이 없다/정동윤 섣달 그믐에 지는 해나 정월 초하루에 솟은 해나 열두 달 같은 해죠 어제 저녁에 뜬 달이나 오늘 아침에 진 달이나 삼백육십오 일 같은 달이죠 여기저기 아침 해라 퍼나르고 보지 못한 저녁 달인 양 삽질하는 인터넷의 낭비는 좀 씁쓸하죠 남의 보따리 뒤적이면서 '그래서, 뭐.' 하면 다투기 싫어 물러나겠지만 해가 지든 달이 뜨든 벅찬 가슴 가라앉힐 연륜으로 무게의 중심은 잡아 주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