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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디오게네스

서울역 디오게네스/정동윤 유난히 남루한 노숙자 서울역 광장 구석 벽에 모로 누워 지나가는 세월 멍하니 바라본다 구세군 냄비의 딸랑거림도 급식 봉사자의 빵 봉지 유혹도 눈곱 떼기보다 귀찮아 빵 한 쪽 얻기 위해 긴 줄 오들오들 기다리느니 차라리 굶는 게 낫다 스르르 잠든 사이 누군가 빵 봉지를 두고 갔다 구세군 종소리는 아련히 딸랑거리는데 빵 봉지 뜯기는 식탐으로 허겁지겁 먹어대는 눈치 없는 거지 같아서 싫다 누가 봉지를 찢어 빵 한 조각 입에 넣어주면 못 이기는 척 씹기는 하겠으나, 그나마 다행인 건 주말마다 들리던 데모의 악다구니가 눈 내리는 오늘은 잠잠해서다.

혜화동 겨울 저녁

혜화동 겨울저녁/정동윤 겨울비 내리는 저녁에 혜화동을 걸었죠 젊은 예술가의 거리는 활기 넘치고 연인들의 모습은 한 여름 오후 같았죠 식당들의 유혹 소극장의 손짓 자유분방한 풍경과 사람들 그래도 내 눈엔 시인 우두 김광균의 '설야' 시비가 들어왔고 고산 윤선도의 시비 '오우가'가 맺혔죠 낙산에 올랐다가 한성대역으로 내려와 다시 혜화역까지 걸었죠 비가 눈이었으면 ...

우리도 철새처럼

우리도 철새처럼/정동윤 중랑천 하류 한강과 만나는 곳에 물새들이 군데군데 뭉쳤다. 무슨 모임인지 몰라도 물 위에서 서로 마주보며 찧고 까불고 푸득거리며 활기차다. 넙적부리 물닭 댕기머리 알락오리 고방오리도 구석의 왜가리도 말 할 기회를 기다린다. 지상으로 인간들이 걸어가는지 자전거로 달리는지 망원경으로 자신들을 훔쳐보는지 신경쓰지 않는다. 나그네새의 삶을, 눈부신 하루를, 빛나는 물결 위에 둥둥 띄우며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하루를 충실하면 온 생애가 충실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