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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을 넘으며

인왕을 넘으며/정동윤 인왕산 북쪽 홍제동 개미마을 언덕 위엔 하늘로 달리는 묵직한 기차바위에 보름 저녁달 단추 누르면 도시는 단풍색 불로 반짝이고 달도 노랗게 불이 켜진다 밤하늘 동그란 등불 치마바위 아래 단풍색 도시는 은하의 한복판을 통째로 오려 네 개의 산을 기둥으로 박아 달걀 모형의 울타리 안에 누이니 지상의 은하수는 잠들지 못한다 별빛으로 써내린 오천 년 일기 왈본에 두둘겨 맞은 몇 쪽의 역사 상처가 묻힐까 도성 성돌 아래 새벽이슬 내릴 때까지 두 눈 부릅뜬 파수꾼의 조명은 쉬 잊을 수 없는 날들을 곱씹는다 인왕의 남쪽에 하숙한 시인 수성동 계곡을 거닐던 윤동주 '또 다른 고향'을 숲에서 그려보며 일본을 왈본이라 바꿔 불렀지만 이름까지 빼앗긴 후쿠오카의 단발마 그 감옥의 절규는 아직도 들려오네. ..

늙은 수사자의 여유

늙은 수사자의 여유/정동윤 고기를 씹으면 반은 잇속에 끼고 반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찬물을 마셔도 나무에 기대기만 하면 졸리고 구름만 보면 눈이 감긴다 사냥 나갈까 쉴까 선택하라면 곧바로 쉬고 싶다는 몸짓 잠시 좀 걸을까 물어도 한 일도 없었는데 쉬어야겠다며 그늘 찾는다 머리칼이 가늘어져 정수리 훤히 보여 햇살을 피해 다니지만 평지를 걸어도 땅바닥에 걸려 휘청이고 오르막은 느릿느릿 걷는다 가끔 천둥소리에 뛰고 숨고 피하며 허둥대다 자리 잡으면 잠잠하다 일상이 불편하고 몸의 반응이 좀 늦어도 신세 지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늙은 수사자의 여유로 직접 사냥하지 않아도 그늘 좋은 나무 골라 앉는다.

카테고리 없음 2022.12.05

진경산수화 길

진경산수화 길, 겨울 산책/정동윤 겸재의 진경산수화는 눈 앞 풍경에 화가의 생각을 담아 자신의 시선이 잘 드러나도록 사물의 본질을 파고드는 그림이다 한 시대를 열어주는 그림, 그 뜻을 따라 걷는 겨울 산책은 창의문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서시' 비와 뒷면의 '슬픈 족속'을 낭랑히 읽고 출발한다 발 아래, 청운 문학도서관은 한옥 기와집 마당의 연못과 꽃담이 일품 백운계곡 절벽 위의 그윽한 자태 한양의 서촌이 옹기종기 보인다. 눈 밑 백운동천 바위, 그곳으로 가려면 구기터널 입구 옆 모르몬교의 교회당 언덕을 오르면 풍운아 김가진 전 법무대신의 집 시들고 바랜 묵정밭 변함없는 바위 온 길을 되돌아서, 언덕 아래 경기상고로 들어서면 화단엔 고귀한 붉은 반송의 도열 건물 뒤쪽에 은거한 청송당지는 청송 성수침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