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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밑의 장작

처마 밑의 장작/정동윤 장작이 파란 불꽃 일구지 못하면 그저 불쏘시개일 뿐이지요 시골 집 처마 밑에 흙벽 따라 쌓아둔 나무토막들 굵직한 놈 하나 골라 아궁이에 던지면 새파랗게 타올라야 장작이죠 어느 봄날인들 꽃피우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어느 여름인들 그늘 만들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온돌을 데워야 하는 시절 흘러간 영광에 취해 아련히 추억만 곱씹을 수는 없죠 뒤돌아보며 나아갈 수 없는 풀꽃처럼, 물기 말리며 불꽃 피워내는 우리네 인생처럼. 내 휴대폰 시의 창고에 미완성된 시 한 편이 없다면 꺼내서 퇴고할 글 한 편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장작이 아니겠죠 부엌 바닥에 흩어진 알량한 불쏘시개일 뿐.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김춘수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쏘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 바숴진 네 두부는 소스라쳐 삼십보 상공으로 튀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슈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

겨울나기

겨울나기/정동윤 잠자기 전에 가습기 대신 물 적신 수건 솔방울 담은 그릇엔 물을 넉넉하게 뿌려둡니다 수건 다 마를 때까지 솔방울 꽃으로 피어나며 그들이 간직한 물기 한 톨 남김없이 돌려줍니다 메마른 방 적셔주는 수건과 솔방울, 그들은 입도 뻥긋 안 합니다 자신의 가슴 다 말라버려도 나는 누군가를 위해 추운 겨울 건조해진 가슴에 물 한 방울 내어준 적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