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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소 책방에 앉아

초소 책방에 앉아/정동윤 흐린 날의 주말 오전 초소 책방 옥상의 비닐 텐트 텐트 안을 휘감는 진한 커피향과 구수한 빵 냄새 들뜬 분위기 살리는 는개같은 뽀얀 비가 내려 흐느끼는 재즈 음악에 스르르 눈을 감는다 아까 눈 쌓인 오솔길 산객들 내려오는 인왕산 옛 그림 속의 물줄기가 눈으로 덮인 폭포로 보였는데 다시 온화한 실내 사람들마다 편안한 미소 커피 식어 가는 줄 모르는 느긋한 책방의 한나절 빵을 먹어도, 책을 읽어도 소곤거려도, 함께 웃어도 비트 짙은 음악에 커피 향도 방향을 놓친다 지난번에 수필 한 권 후딱 읽고 갔는데 오늘은 서재인 양 글 한 편 뚝딱 짓는 초소 책방

새해 첫 나들이

새해 첫 나들이/정동윤 아내의 백내장 수술로 밝아진 세상 며칠 지나서야 찾아간 남산의 숲 더 환해진 나무 그림자 틈으로 뿌리들의 수런거림이 들린다. 뿌리를 타고 오르는 물길처럼 역사의 실핏줄 청계천에 이르니 물속 버드나무 가지에 걸린 회색 구름의 애잔한 눈빛이 둥둥 떠도는 청둥오리 바라본다 사람만 살지 않는 창덕궁은 수많은 생명들의 고마운 터전 눈 쌓인 조정 품계석 밖으로 부엉이 솔개 무수리 참새들도 봄날의 모란을 기다리는 중이다. 과거의 뜰을 거닐며 오늘도 숨어 사는 족제비는 안다 봄 후원의 약속 인간의 방문을, 남산, 청계천, 창덕궁 건너온 한나절이 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지를.

7그리운 바다 성산포

그리운 바다 성산포/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 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빈 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도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을놈의 고독은 취하지도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는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그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는 그 슬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