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일기/정동윤
봄여름이 풀빛의 채움이면
가을은 흙빛의 비움이고
겨울은 빈 숲의 평안이다
사계절 다른 빛깔로
초록은 넘치지 않고
갈색은 자만하지 않으며
봉우리 높이만큼 채우고
계곡 깊이만큼 비운다.
제비꽃 한 송이가 채움이고
갈참나무 한 그루가 비움인데
가을 숲 산책 중에
얼굴에 걸린 거미줄 떼어내고
노을 비낀 세상 내려보며
신호등처럼 건조한 만남은
바뀌는 불빛처럼 금방 잊어버리고
제 갈 길로 돌아와 다시 걷는다
비는 내리면서 흐르고
눈은 쌓이면서 녹지만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나무
바깥쪽 나이테에 적는
세월의 일기는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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